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유용함'으로만 재단하는 사회의 잔인함을 폭로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부조리 문학을 넘어, 관계 속에서 존엄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지를 묻습니다. 오늘은 카프카가 던진 이 질문을 세 가지 키워드로 깊이 있게 분석해 보겠습니다.
유용함의 폭력: 존재를 도구로 전락시키는 시선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장 먼저 걱정한 것은 자신의 몸 상태가 아니라 "이 상태로 어떻게 일하러 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6시 반에 일어나 7시 기차를 타야 하는데, 자명종이 제대로 울리지 않았다는 걱정, 7시 기차를 타더라도 사장의 호된 꾸지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5년 동안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성실한 외판 사원으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벌레가 된 순간에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집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의 반응입니다. 지배인이 직접 찾아와 "사장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즉시 분명하게 해명할 것을 엄숙하게 청하는" 장면에서, 그레고르는 여전히 자신이 "8시 차로 떠나겠다"라고 답합니다. 그는 정말로 문을 열고 벌레로 변한 자신을 내보여 지배인과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든 것을 태연히 받아들인다면 이 끔찍한 벌레 상태로도 8시에는 기차에 올라타 일을 하러 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사람을 한순간에 "유용함"으로만 재단하는 시선이 얼마나 잔인한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레고르는 외판 사원으로 돈을 벌어 와 가족들 앞에 돈을 턱 하니 내려놓을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조금만 돈을 더 벌어 따면 집안의 사정은 안정되고 누이동생을 원하는 음악 학교에도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계획을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 엄숙히 천명할 계획이었던 그에게, 가족은 사랑이 아니라 경제적 책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벌레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가족을 위해 일하겠다고 몸부림쳤지만, 가족은 그의 존재를 돌보는 대신 '정리해야 할 문제'로 바꿔 불렀습니다. 유용함을 잃은 순간, 그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방치의 잔인함: 등에 박힌 사과와 썩어가는 관계
어느 날 방을 몰래 탈출한 그레고르를 본 어머니가 혼절해 버리자, 아버지가 그레고르를 향해 사과 조각을 무차별적으로 던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다시 방으로 쫓겨난 그레고르의 등에는 사과 조각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 아무도 사과 조각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레고르의 살 속에 박힌 사과는 그의 몸을 썩게 하고 병들게 했습니다. 이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상징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은유입니다.
가장 무서운 폭력은 때로 욕설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등에 박힌 사과를 아무도 빼주지 않는 순간,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계산이 됩니다. 누이동생은 결국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렇게 계속 지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저것을 돌보고 참아 내기 위해 사람으로서 할 도리는 다 해봤어요. 이게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그레고르는 더 이상 오빠가 아니라 '저것'이 되었습니다. 가족은 그를 '사람으로서 할 도리'를 다해 돌본 대상으로 여겼지만, 정작 그의 등에 박힌 썩은 사과는 끝까지 방치했습니다.
이제 그레고르는 그의 등에 박힌 썩은 사과로 곪아 버린 고통도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따금씩 그레고르를 들여다본 가정부가 기다란 빗자루로 그레고르를 간지럽혀 보았지만 아무런 저항 없이 자리에서 밀려나기만 했습니다. 가정부는 말합니다. "보세요. 얼마나 비쩍 말랐는지 몸이 아주 납작해졌어요." 그렇게 그레고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이동생은 다 함께 집을 떠났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누가 사람을 살리는 쪽에 서 있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방치는 적극적인 학대보다 더 교묘하고 잔인합니다. 왜냐하면 방치하는 사람은 "나는 할 만큼 했다"라고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돌봄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 썩은 사과를 직접 빼주는 것입니다.
존엄의 선택: 비극 너머의 질문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방에 갇혀서 맴돌기만 하다가 살짝 몸을 좀 내밀어서 자신을 드러냈다는 죄로 쓸쓸하게 말라죽게 됩니다. 그가 죽자 남은 가족들은 해방감을 느끼면서 상쾌하게 집을 탈출하기까지 합니다. 아버지는 "자 이제 우리는 신에게 감사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이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해방된 것은 누구일지 생각을 한번 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그레고르 잠자는 아주 쾌적하고 만족스럽게 육신을 내려놓고 마지막 잠을 청했는지도 모릅니다.
반복되는 출퇴근에 지친 직장인이라면 아침에 눈뜰 때마다 차라리 내가 벌레로 변신해 버린다면 하고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실제로 그레고르 잠자는 이 벌레가 된 자신의 상황에 당황하고 절망하면서도 어딘지 평안함을 느낀다는 인상을 줍니다. 왜냐하면 사실 이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보기 시작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5년 동안 일해 오면서 한 번도 아프지 않았으며, 벌레가 된 순간 자신이 실제로 아주 건강했고 몹시 배가 고프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나는 이 책을 "비극"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누군가가 무너졌을 때 곁에 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어려움을 끝까지 선택하는 것이 진짜 강함임을 배우게 합니다. 회복은 기적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누군가의 변신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존엄을 지키는 쪽을 택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됨입니다. 그레고르의 가족은 "집에서도 밤에는 문을 모두 꼭꼭 걸어 잠그는 조심성이 몸에 밴"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가족 안에서 무너지는 존재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군가의 등에 박힌 사과를 빼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사람입니까? 유용함을 잃은 존재 앞에서도 여전히 그를 사람으로 대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람을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재단하고, 쓸모없어진 존재를 방치하며, 불편한 관계에서 도망치는 것을 합리화합니다. 진정한 변신은 그레고르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이 작품을 통해 존엄이란 조건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었지만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존재였습니다. 그의 가족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변하지 않는 본질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누군가에게 짐이 될 수 있고, 유용함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지켜줄 것은 생산성이 아니라 관계의 진정성입니다. 나도 누군가의 변신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존엄을 지키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167) 당신은 '변신'하겠습니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6분 안에 듣는 고전문학 [6분 클래식] - YouTube
https://youtu.be/jhzNs1gPT54?si=QYOEUvrE91ufTLp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