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나아질 것'을 요구합니다. 더 똑똑해지고, 더 성공하고, 더 완벽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니얼 키스의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은 그 질문의 본질을 뒤집습니다. 과연 무엇을 위해 우리는 더 나아지려 하는가? 1966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이 작품을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과 회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지능향상 실험이 드러낸 인간 존엄의 조건
32살 찰리 고든은 일곱 살 수준의 지능을 가진 채 뉴욕 빈민가에서 살아갑니다. 비크맨 대학의 스트라우스 박사가 그에게 지능 향상 수술을 제안했을 때, 찰리는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그 기회를 받아들입니다. 수술 전 슈퍼쥐 앨저넌과의 미로 게임에서 번번이 패배하던 찰리는, 수술 후 앨저넌을 이기기 시작하고, 급기야 자신을 수술한 교수들조차 능가하는 천재가 됩니다.
그러나 지능이 향상된 찰리가 마주한 세상은 그가 꿈꾸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본 것이 벌거벗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었듯, 찰리가 최초로 느낀 감정은 어디론가 숨고 싶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자신을 보고 웃던 사람들이 사실은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었다는 진실을 깨달은 순간, 찰리는 지능이 높아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성과와 능력으로 사람을 재단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인간의 존엄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찰리가 지능이 낮았을 때 받았던 조롱과, 천재가 된 후에도 느낀 소외감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옵니다. 사람을 그가 가진 능력과 성과로만 평가하는 세상의 잔인함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이겨서 증명하기보다, 누군가를 살려서 증명해야 합니다. 규칙과 체면이 사람을 짓누를 때, 겉으로 맞아 보이는 말보다 속에서 자라나는 자비와 정직을 먼저 봐야 합니다. 찰리의 이야기는 눈에 띄는 강함보다 마음이 꺾인 자리에서 다시 숨을 쉬게 하는 회복이 얼마나 귀한지를 일깨웁니다.
죽음의식을 덮어둔 시대의 위험
찰리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막연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천재가 되어 세상의 모든 지식을 통달했지만, 그 지식이 그에게 알려준 것은 슈퍼쥐 앨저넌에게 나타난 이상 증상이었습니다. 앨저넌의 지능은 향상되었던 속도보다 빠르게 퇴행하고 있었고, 이는 찰리에게도 곧 닥칠 일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연구 끝에 찾아낸 진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스트라우스 박사의 지능 향상 실험은 실패했고, 찰리의 지능 역시 빠르게 퇴행할 것이며, 어쩌면 최초의 상태보다 더 악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앨저넌의 죽음 앞에서 찰리는 자신에게 닥칠 몰락의 그림자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느끼는 묘한 거리감은 무엇일까요? 찰리의 비극을 마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처럼 관망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 말입니다. 하지만 퇴행과 몰락, 그리고 죽음은 찰리에게만 벌어지는 특수하고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은 인류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죄의 결과입니다.
키블러 로스는 죽음 연구의 가장 본질적인 핵심이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죽음을 연구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는 그의 고백은, 우리 삶에서 죽음을 덮어놓으면 삶의 의미 또한 덮어 놓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우리 시대가 죽음을 감쪽같이 덮어두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 죽음을 꺼내어 들추는 것이 철학이고 예술이며 진리라고 말합니다. 일상과 죽음이 완전히 분리된 시대, 인류가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넘어졌을 때 우리는 그를 밀어내기보다 곁에 서서 함께 일어설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진실한 삶을 향한 용기입니다.
회복의 가치, 비극 너머의 진짜 희망
소설은 비참한 상태로 몰락해 가는 찰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납니다. 어떠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찰리는 퇴행을 멈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인류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를 결코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결말을 '아름다운 비극'이라고 포장하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 마음속에 오랜 시간 맴도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찰리에게 우리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 찰리는 우리 인류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천재가 된 찰리가 깨달은 것이 결국 자기 자신의 몰락이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희망의 시작점이 됩니다. 자기 몰락을 깨달은 자만이 구원을 소망하게 되고,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회복의 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약점으로 낙인찍기보다, 그 상처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회복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힘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낮아짐과 섬김 속에서 진짜 권위를 배워야 합니다. "누가 더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더 사람을 살리는가"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결단으로 여기고, 내 편에게만 친절한 쉬운 사랑이 아니라 불편한 사람에게도 존엄을 지키는 사랑, 미움이 번지지 않도록 한 번 더 멈추는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용서는 약함이 아니라 강한 마음의 기술입니다. 상처를 갚아 돌려주는 대신, 그 고리를 끊어 관계가 다시 숨 쉬게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대니얼 키스가 『앨저넌에게 꽃을』을 통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더 나아지려 하는가? 그 답은 승리가 아니라 회복에, 높아짐이 아니라 섬김에, 정죄보다 화해에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정죄보다 회복을, 승리보다 화해를, 높아짐보다 섬김을 향해 걸어가는 것—그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며, 찰리의 비극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출처]
Ep. 11 대니얼 키스 : 앨저넌에게 꽃을 / 그리스도인의 시선으로 책읽는 시간: https://youtu.be/JbRhhcTsxU4?si=qrxoo9vs4YRSMcn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