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거장의 복귀작이라는 기대감 속에 개봉했지만, 관객의 반응은 예상보다 양극화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이 어떤 점에서 관객의 호불호를 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난해함, 상징성, 미야자키 하야오의 독자적 연출 스타일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관객이 이 작품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혼란과 감동,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미학적 의도를 함께 짚어보며, 미야자키가 전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난해함: 선형 서사를 거부한 '의도된 불친절함'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처음 접한 관객이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당혹감’ 일 것입니다. 익숙한 기승전결이 아닌, 파편적 이미지와 장면 전환이 반복되는 전개는 일반적인 서사 중심 관객에게 큰 혼란을 안겨줍니다. 이는 단순히 복잡하다는 의미를 넘어, 서사를 해체하려는 의도적 시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에서 명확한 갈등 구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주인공 마히토가 겪는 성장 여정은 심지어 외적 사건보다 내면의 심리적 움직임에 더 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건과 사건이 연결되기보다는,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의 정서를 형성하며 감각적으로 흐릅니다. 이 방식은 설명보다는 '느낌'을 전달하는 예술적 언어에 가깝지만, 플롯을 중시하는 관객에게는 서사의 실종처럼 느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이는 마치 미술에 배경지식이 없는 사람이 명작이라는 그림을 보면서도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이 관객이 작가의 의도를 해석하기 정말 어렵게 만듭니다. 실제로 관객 반응 중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 "해석이 필요하다", "두 번 봐야 이해된다"는 평이 다수 등장했습니다. 이는 미야자키가 이 작품을 통해 직관과 상상에 의존한 감정의 퍼즐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관객이 익숙한 내러티브 안에서 편안하게 머무르기보다는, 낯설고 추상적인 세계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는 관람’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익숙함에 기반한 감상 방식을 흔들고, 대중성과 일정한 거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특히 기존 지브리 팬들조차 당황스러워할 수 있는 구성은, '이해 불가'라는 반응과 '깊은 여운'이라는 반응이 공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처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난해함은 단점이라기보다는, 감상자의 태도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예술적 장치로 작용합니다.
상징성: 은유와 이미지의 밀도, 해석의 자유와 부담
이 작품은 이야기보다 이미지가 먼저 다가오는 영화입니다. 미야자키는 작품 전반에 걸쳐 수많은 상징적 장면과 오브제, 생명체, 공간 구조를 배치합니다. 불타는 병원, 새처럼 생긴 인간 군상, 시간을 초월하는 문, 상자 속의 세계 등은 직접적인 의미 전달보다 감정적 인상을 남기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상징은 '탑'과 '상자'입니다. 탑은 세계의 질서와 창조자라는 주제를 함축하고, 상자는 ‘선택’과 ‘운명’, 그리고 창작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투영한 장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영화 안에서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관객에게 해석의 몫으로 남겨집니다. 이는 두 가지 반응을 낳습니다. 하나는 의미를 읽는 즐거움이고, 또 하나는 설명 없는 불친절함입니다. 특히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제나 결말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가 부재하기 때문에, 관객은 일종의 정서적 공백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주요 지점 중 하나입니다.
한편, 이런 상징성은 미야자키가 창작자로서 고민해 온 예술과 윤리, 삶의 선택에 대한 철학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의 구조보다, 이미지가 던지는 질문과 감정의 파동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그리고 이는 관객이 수동적 감상자에서 해석의 주체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의도로도 읽힙니다. 결국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관객에게 해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게 만듭니다. 이런 상징 중심 서사는 해석의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감상의 부담 또한 함께 안기게 되는 셈입니다.
미야자키 스타일: 순수한 환상과 자기 반영적 창작의 공존
이번 작품은 지브리의 정통성을 잇는 동시에,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의 예술적 고백에 가까운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즉,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서사가 명확하고 보편적인 이야기 구조를 갖춘 작품이 아니라, 노년의 미야자키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 가까운 자전적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주인공 마히토의 이름은 실제 미야자키의 손자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 전반의 창작자와 세계 구조에 대한 은유는 감독 자신의 창작 고뇌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읽힙니다. 이로 인해 영화는 대중적 접근성과 일정한 간극을 만들게 됩니다.
미야자키 특유의 비현실적 존재와 환상적 공간의 묘사는 이번에도 유효합니다. 다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의 판타지는 아동을 위한 유희가 아니라, 삶과 죽음, 윤리와 창작의 문제를 탐색하는 철학적 환상에 가깝습니다. 이는 기존 지브리의 ‘따뜻함’보다는, 질문과 사유의 감정을 남기는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또한, 그는 이번 작품에서 익숙한 설명과 클라이맥스를 의도적으로 배제합니다. 이는 "설명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관객의 능동성을 자극하려는 전략이며, 예술가로서의 자기 고백과 철학적 성찰을 담은 방식을 선택한 결과입니다. 결국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기존 지브리 작품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개인적 창작 여정의 정점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환상과 현실, 창작과 윤리, 개인과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 작품은, 단순한 감동보다는 깊은 여운을 남기며 관객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고 있는 셈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대중성과 예술성, 서사와 이미지, 설명과 상징 사이의 경계에 선 영화입니다. 익숙한 방식으로 감정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낯선 세계와 상징을 통해 감정의 결을 만들어내는 작품이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는 감상자의 수용 태도에 따라 ‘이해되지 않는 난해함’이 될 수도, ‘깊은 해석이 필요한 명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던졌던 삶의 질문을 관객에게도 돌려주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는 관객에서 당신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제목부터 전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선 예술적 의미를 완성합니다.